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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연합)은 ?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올 무렵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 운동이 새로운 활력소로 등장하였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짧은 기간 내에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횡단하여 전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나가 한국을 비롯한 82개국에 성령세례를 받은 수많은 교인들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오순절 성령 운동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 오순절교회는 1933년에 교회가 세워진 후로 20여년이 지나도록 10개의 교회에 500명의 교인을 채 얻지 못하였으므로 교회성장의 측면에서 보면 오순절적 이미지에 부합되지 못 하였다.

  그러한 원인 중의 하나는 선교 방법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선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실시되었고 또 어떤 단합된 교회 조직이 없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가 발족됨으로써 비로소 조직화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성립(1953.4.8)

  (1)조직경위

  8.15 해방을 맞이하여 자유를 얻게 된 한국 오순절 교회는 박성산 목사를 비롯하여 배부근 목사와 허홍 목사가 다시 합류하면서 교단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 1950년 4월 9일 제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나 6.25 사변이 터짐으로써 오순절 교회는 다시 공산군의 박해를 받게 되었고 구체적인 교단 조직의 기대가 무산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기묘하여 오히려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직에 대한 역사를 이뤄가고 있었다.

  그것은 6.25 전쟁이 한창인 때 미국 종군 목사인 엘라우드(Ellowed)가 입국한 것이었다. 엘라우드 목사는 미군들의 군목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오순절 교회의 현황을 파악하다가 허홍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1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며 미국 하나님의 성회를 소개하게 되었다. 엘라우드 목사는 1951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 오순절 교회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를 서로 연결시켜 주겠다고 약속 하였다. 그리하여 엘라우드 목사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굳(Osgood)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오스굳 목사는 한국에 머물면서 허홍 목사, 박성산 목사, 배부근 목사 등을 만나 한국 오순절 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 후 귀국하였고, 그 해 12월 15일에 정식으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로 체스넛(Arthur B.Chesnut)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체스넛 목사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일하다가 중국이 공산화되자 일본에 와서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 본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었다. 체스넛 목사가 내한하자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조직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는데, 박성산 목사가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로 순회하며 흩어져 있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와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 당시 오순절 교회의 교역자는 체스넛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7인이었는데 그들은 허홍 목사, 박성산 목사, 곽봉조 목사, 배부근 목사, 윤성덕 목사, 김길윤 목사와 박귀임 전도사 등이었다.


  (2)교단의 명칭

  1953년 봄이 되면서 교단 조직의 준비가 거의 완결되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웠던 문제는 창립 총회시 교단 명칭을 한국어로 어떻게 부르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도 교단 명칭을 'Assemblies of God'으로 결정하기까지 문제가 많았다.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 오순절성결교회(Pentecostal Holiness Church), 오순절복음교회(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등 명칭이 다양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로 귀착되었다. 그러나 이 명칭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1927년 '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로 가결 하려다가 지방 교회의 재산등기 변경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실무진의 보고에 의해 'Assemblies of God'으로 존속키로 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교단 명칭을 신중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채스넛 목사는 중국의 예를 들어 신소회(神召會)로 명명하자고 했으나 허홍 목사의 의견대로 하나님의 성회라고 결정되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1966년 제 15회 총회시 교단 명칭을 바꾸자는 안건이 상정되었으니 그 명칭은 기독교 대한 순복음회와 기독교 대한 오순절회였다. 이 안건은 부결되었으나 그 역사적 상황은 미국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는 'Assemblies of God' 의 번역인데 그 번역에 있어서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Assemblies는 회합, 집합, 대회, 모임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교회의 명칭으로  ᄋᄋ협회 또는 ᄋᄋ집회라 하기에는 부적절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Assemblies를 Church와 같이 보아 교회로 번역하기도 문제가 있어 결국 Holy Assemblies의 뜻으로 "성회(聖會)"라고 하였다. God에 있어서도 신이나 하느님, 하나님 등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했으나 "하나님"이 가장 좋다고 함으로써 교단의 정식 명칭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된 것이었다. 영어로는 "Korea Assemblies of God" 이며 통칭 "순복음 교회"라고 부른다.

 
  (3)교단의 결성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결성을 위한 창립총회가 열린 곳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65번지인 남부교회였다.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열린 하나님의 성회 결성 총회에서는 체스넛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허홍 목사가 통역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체스넛, 허홍, 박성산, 배부근, 윤성덕, 박귀임 등 교역자 7인과 방청인 4인을 합해 모두 11명이었다.

  이 첫 총회에서 토의된 사항은 교단 창립에 관한 제반 사항으로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헌장이 제정 가결되었고, 헌장에 의해 총리로 체스넛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교장에 체스넛 총리가, 학감에 허홍 목사가 내정 되었다.


2)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발전

  (1)1950년대(시대적 배경)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약을 맺음으로 외면상 전쟁은 끝났으나 교회는 저명인사들이 납치 되었거나 순교했기 때문에 지도자 결핍에 빠졌으며 이런 공백을 틈타서 이단 종파가 머리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이단 종파들은 가혹 하리 만큼 현실적이며 철저하게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상태에 접속되어 있어 확고한 삶의 방향을 제시 못하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한국 교회를 우롱하며 갖은 피해를 입혀 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1953년 봄에 조직된 후 해마다 발전을 거듭하였다. 1953년 10월에 14개 교회였던 것이 1954년 8월에는 28개 교회로 배나 증가하였고, 1955년 말 에는 44개 교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서울 용산구 한강로 남부 교회에서 출발한 순복음 신학교는 초대교장 체스넛,학감 허홍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어 오다 1953년 8월1일 교사를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로 이전하였으며 1955년 2대 교장에 스텟츠(John Stetz) 선교사가 부임했다. 그러나 1956년 순복음 신학교 맹휴 사건이 교단 분열의 원인이 되어 허홍 목사가 2대 총리로 당선 된지 반년 후인 1957년 11월에 분열의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56년부터 나타난 교회 분열의 조짐은 교회를 혼란으로 밀어 넣었으나 1957년 가을부터 부흥집회가 열림으로써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성회의 최초의 집회는 1957년 가을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 허만(Harald Herman) 목사의 내한으로 이루어졌다. 허만 목사는 중앙청 앞 광장에서 24일간 집회를 계속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회의 신앙을 널리 소개하였다. 이어 1958년 여름에는 버드(Ralph Byrd) 목사가 수원, 대전, 부산 등 여러 도시에서 큰 성회를 열었다. 1957년부터 교단 분열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흥 성회로 말미암아 더욱 알차고 견실해져 갔다.

 
  (2)1960년대(하나님의 성회의 도약의 시기)

  1957년 11월 하나님의 성회가 분열되자 허홍 목사는 대한 오순절 교회로 환원했고 곽봉조, 윤성덕 목사는 한국에 입국한 구도(L.W.Coote) 선교사와 손을 잡고 대전 가양동 28번지에 중도 성서신학교를 세우고 극동사도 선교회의 주역이 되었다.

  1955년에 7명,1956년에 1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순복음 신학교는 1958년 8월에 존스톤(R.A.Jonston) 선교사가 제3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대는 하나님의 성회의 도약의 시기였다. 교단의 분열로 교단내의 주요 인물들이 타 교파로 탈퇴해 나갔으며 힘은 분산되었으나 한편으로는 교단이 더욱 단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9년12월28일 아세아 선교 부장 켓참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세계 복음화 운동의 지정국으로 결정하고 상당한 선교비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갖고 내한하였다. 이러한 사업의 제일보로 2만 불의 선교비를 투입하여 교회 사업, 문서사업, 선교사업, 신학교 확장 등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1)신학교 대지 확보 및 교사 신축 이전, (2)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의 부흥 목사 파송, (3)중앙 복음 회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토트 전도회'(Todd Mission) 및 '치료의 목소리'(Voice of Healing) 두 전도단과 중앙 복음 회관 건립을 위해 협약을 맺고, 우선 서대문에 292평의 대지를 구입하였다. 또한 신학교 대지 확보 및 건축 계획도 잘 추진되어서 대조동에 약 1만평의 대지를 사들였으며 1960년 3월에 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문서 운동에 있어서도 서울 중앙 도서관을 두었고 부산에도 도서관을 두며 오순절 잡지를 발간하여 오순절 신앙을 한국에 널리 전파하기로 하였는데 1964년 6월 비정기 간행물로 순복음 잡지가 발간 되게 되었다.

  1965년도의 교세는 선교사 8명, 목사 16명, 전도사 32명으로 집계되었다.

  1966년 제15회 총회시 교단명칭 개헌안이 상정되었으나 원래의 명칭을 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12대 총회장에 조용기 목사, 부총회장에 박종수 목사, 총무에 박광수 목사가 선출되어 선교사에 의한 총회 구성으로부터 탈피하여 한국인 주도의 총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1969년 5월 부산 순복음 교회에서 열린 제18회 총회에서는 전면적인 헌법 개정안이 가결되었다.


  (3)1970년대(세계적 교단으로 부각)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 교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성결교회에 이어 네 번째의 교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은 민주화 운동으로 진통을 격고 있고 교계에서는 많은 목회자들이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72년 10월 24일 하나님의 성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오순절 총회와 전격 통합을 하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성회의 창립 멤버였던 허홍 목사는 1956년 교단을 떠난지 16년 만에 복귀하여 본 교단의 원로로서 추대되었다. 1973년 5월 제22회 정기총회와 그 다음해 제23회 정기총회시 교단 명칭에 관한 개정안이 상정되었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1977년 5월 16일 제26차 정기 총회에서는 재단 법인 정관 개정안을 통과 시켰고 관심이 되어 오던 여 목사 제도는 부결시켰으며 대조동 산 24번지에 소재한 순복음 신학교를 경기도 군포로 옮기고 총회 임원임기를 1년으로 하며 지방회장은 2년까지 연임 할 수 있다는 임원의 임기에 관한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1980년 5월12-14일 서대문 총회 회관에서 열린 제29차 정기총회에서는 27개 헌법 개정안을 심의한 결과 부총회장을 2인제로 하자는 안건을 통과 시켰다.

   1981년 4월13일에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30주년 기념 대회 행사가 서대문 총회 회관에서 있었고 이어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700여명의 교역자와 30여 만 명의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교단이 안정되고 발전되자 시기를 하듯 또 하나의 아픔이 교단에 생기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의 이단 시비로 인한 교단의 분열이 생긴 것이다.


3)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분열

 (1)초기의 분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세워진지 5년이 채 되기 전에 교단 내에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하나님의 성회는 교역자 수가 30여명에 불과한 작은 교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그룹과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그룹과 파는 편의상 구별해 본다면 몇몇 목사를 중심으로 "갑(甲)","을(乙)","병(丙)"그룹의 세 그룹과 교리적으로 "삼위일체 신앙파"와 "오직 예수 신앙파"의 두 개 파가 있었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설립 구성원들이 대체로 오순절 신앙을 가졌고, 또 일본 성서 학원에서 수학한 공통 배경을 갖기도 하였으나 일부 임원들은 오순절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점도 고려해 보면 이런 요인들이 파벌을 심화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수차의 민사, 형사 소송 끝에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하나님의 성회 간부 중에 불의한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으며, 선교사의 보고서에도 "성회 조직 초기 성회에 모여든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참된 오순절 신앙인이 아니었음이 알려졌다"고 쓰여져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이 사건의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표면적 요인들은 1956년 허홍 목사가 3대 총회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1957년도의 제6회 총회의 결과가 명백하게 남아 있지 않다는 점과 또 허홍 목사가 총회장이 된 후 분열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분열 사건으로 1957년 11월 말경 허홍 목사는 대한 기독교 오순절 교회로 이탈하였다.

  1958년에는 극동 사도 교회가 한국에 전래되었는데 곽봉조, 윤성덕 목사 등은 하나님의 성회를 떠나 구도 선교사와 손을 잡고 대전에 중도 성서 신학교를 세워 극동 사도 선교회의 주역이 되었다. 이 후에도 간헐적으로 교단을 탈퇴하는 일들이 있었고 1961년 9월 임시총회를 기점으로 교단 내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 하던 일부 사람들이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장로교 등으로 탈퇴해 나감으로써 4년에 걸친 분열기의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던 허홍 목사는 교단 분열 후 16년 만에 복귀하였고 1972년10월24일 교단 임시총회에서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대한 기독교 오순절 교회가 통합되었다.


 (2)2차분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순복음 중앙교회(여의도순복음교회)가 분열하게 된 도화선은 순복음 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에 대한 장로교 통합측의 이단 시비가 있자 본 교단 총회에서 교계 신문에 "조용기 목사를 소환하여 사실 심리를 한 후 확인되면 동교회의 목사직을 제명키로 한다"라는 기사를 실음으로 문제가 되었다.

  통합 측의 거론되었던 조용기 목사에 대한 내용은 해외에서의 개인적인 목사 안수의 문제, 조상 숭배의 문제(제사문제), 처녀 부활 사건 등이었다.

  1994년 지금도 이 문제는 계속 거론되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것으로 인해 총회에서는 조용기 목사의 제명을 결정하였고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중앙 교회측은 1981년 10월13일자 교계 신문에 해명과 함께 교단 탈퇴 선언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총회의 결정에 19개의 전현직 지방회장들은 총회장 불신임 및 임시총회 소집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또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서는 총회장 명의로 한국 하나님의 성회가 속히 평온을 찾기를 바란다는 전문을 보낸 후 세계 및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 허스트 목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허스트 목사는 문제해결을 위해 임시 총회 소집을 시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순복음 중앙교회를 비롯한 순복음 측에서 단독으로 총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순복음 측 총회에서는 전국 700여명의 소속 교단 교역자 중에 364명이 참석하였다. 1981년 12월 7일-8일 양일 간 열린 제31차 임시총회에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총회장에 신창균 목사를 선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창립 된지 28년 만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 측(반포측)과 총회 측으로 양분되었다. 이로써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다시 한번 진통을 겪게 되었다.

 
 (3)3차분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반포측(순복음측)과 총회측으로 분열된 지 2년 6개월이 지난 후 양측은 새로운 화합의 길을 찾게 되었다. 1983년 10월 이후 1984년 3월 20일까지 양측은 7차례의 모임을 통해 통합총회를 계획했는데, 마침내 1984년 4월 2일과 3일 양일 간 총회에서 통합 총회를 열게 되었다.

  이 통합 총회에는 총회 측 206명과 반포 측 203명 등 409명의 총대가 참석했으며, 신창균 목사 등 일부 교회들도 분열의 원인의 근본적인 해결이 없는 까닭으로 삼성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였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단독 교회로 남겠다며 순복음 측 교단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설립하여 총회는 세 개의 교단으로 분리되어 하나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측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서대문 측, 그리고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측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갈라진 후에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측 교단은 계속적인 분열이 아닌 분열의 아픔을 맞아야만 했다. 그것은 여러 감언이설에 교단을 버리고 떠나는 교역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신학교 학생들까지 유혹하여 교단을 등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4)4차분열

  3차 분열이 있은 뒤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의 세 개의 교단들은 각기 서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평온했던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에 분열의 아픔이 또 찾아오고 말았다.

  1990년 12월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여의도 측) 일부 교회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서대문 측)일부와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순복음 측)일부의 교회가 군포 신학교에 모여 통합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이 통합의 모임을 위헌으로 세 개의 교단 에서는 정죄를 하고 교계에 발표를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5월 제40차 총회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통합 측)이 새로 설립되어 네 개의 장소에서 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분열 후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통합 측)을 제외한 세 개의 교단에서는 한국 하나님의 성회 협의회를 구성하여 연합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여튼 90년 초에 통합의 노력은 3차 분열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1981년 교단의 분열로 기독교 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들이 오순절 운동에 주력하려 하였으나 1984년 4월 갑자기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탈퇴하여 단독교회로 남겠다고 하여 교단은 새로운 정비를 하여야 했다. 총회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총회조직을 정비하여 총회본부를 순복음삼성교회로 옮기고 그동안 반포사무실에서 시작된 총회에서 주관하는 순복음총회 전도사 연수원 원장에 신창균 목사를 임명하고 순복음성경연구원과 합하여 순복음총회신학교로 학교명칭을 변경하고 제1회 졸업생 66명을 졸업 시켰다. 1984년 관악구 남현동 602-234번지로 학교를 이전, 1987년에는 학교를 건축하고, 1988년에는 산척리에 있는 산척 기도원을 매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9년에는 신학연구원을 개원하여 원장에 신창균 목사를 임명하였다.

  명실 공히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총회와 순복음총회신학교는 계속 성장과 발전을 해오다가 1997년에 또 하나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996년도 실행위원회에서 전직 지방회장의 목사안수 건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교단 현장에는 현직 지방회장이 안수위원장이 되고 지방회의 권위로 안수․임직하도록 되어 있으나 두 지방회에서 직전 지방회장이 안수위원장이 되어 안수 임직하고 안수증서를 준 것은 명백한 위헌임으로 잘못을 시정하고 같은 사건을 막고자 하였으나 해당 직전 지방회장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합법화하려 함으로 만부득이 두 직전회장에 대해 징계절차를 밟자 신학교의 운영 및 재산관리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중진 목회자들과 연합하여 교단을 탈퇴하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개혁측)이란 명칭으로 교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숨돌릴 겨를도 없이 분열은 거듭하여 타 교단보기에 민망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단마다 알차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분열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었던지 또 한번의 아품이 찾아왔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연합)

  미국의 오순절적 교단(OBSC)과 통합을 하여 국내 교단 성장을 꾀하고 동남아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일에 처음엔 동의하였던 당시의 임원진들이 갑자기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통합을 하자는 측과 하지 말자는 측으로 또 다시 교단이 분열되어 양 교단은 엄청난 고난을 치르고서야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통합을 한다고 서두르면 교단숫자만 늘어난 과거사를 통하여 배운 것은 한번 나눠진 교단은 쉽게 통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나눠졌으면 서로 축복해 주고 자신의 발전교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지혜인 것을 깨달았기에 마지막 분열로 태어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연합) 총회 역시 이제는 안정을 찾고 교단도 신학교도 성장 일로에 있으며 특히 해외 선교에 힘써서 여러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고 주님 오실 때까지 땅 끝까지 선교하는 일에 전력할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과분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라 믿고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제 총회는 2006년 5월 서울시 관악구 신림 4동 526-13에 새 둥지를 틀고 제 55차 정기총회에서 양재춘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순복음 연합 신학과 신학연구원, 순복음 연합 평신도 신학원, 순복음 연합 통신신학원, 총회 목회대학원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21세기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양성하여 국내 뿐 아니라 그동안 총회와 신학교의 제1대 총회장과 학장으로 수고하신 제양성 목사님께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선교를 마치시고 귀국하셔서 총회와 신학교에서 제자 양성에 수고하고 계시므로 총회와 신학교가 든든히 서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해외 선교에 이바지할 일군들을 양성하려는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총회원이 분발하고 있다.

 이에 총회와 신학교와 교육재단과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와 후원을 부탁하는 바이다.

 



2명
4165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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